아무 것에도 실패하지 않은 채 완전히 실패해버린 기분

비온 날 실수로 빨아버린 속옷처럼 모든 것이 쪼글쪼글하고 후줄근했다. 퇴근길의 풍경은 늘 후지게 마련이지만 역시 비 탓인지 오늘은 슬프리만큼 얼룩덜룩했다. 땀과 비에 젖은 사람들이 만원 지하철에 빽빽히 널어져 있었고, 저마다의 손엔 명절을 앞두고 일터에서 준비해준, 정형화된 정성이 담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저 사람은 스팸을 받았구나. 사람들은 자기 손에 뭐가 들려있는지도 모르겠다는듯 바쁘게 걸어간다. 이럴 때 지하철은 좀 공장같다.

공장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하철뿐이 아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40분간 준비를 마치고 15분간 간단히 아침을 먹고 8시에 집을 나서기까지의 과정도 엄연한 공정이고 7시의 나와 8시의 나는 원재료과 완성품만큼이나 다르기에 출근준비 역시 공장과 닮았다. 4분 뒤 도착하는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 내린 정류장 오른편의 횡단보도를 건너 8분 뒤 도착하는 버스를 타고 회사 앞에 내리는 것도 비슷한 것 같다. 조일 나사를 기다리며 작업대만 바라보는 직원처럼 아이폰만 보다가 오늘은 버스가 한강을 건너는 것도 몰랐다.(하루 보는 것 중 가장 숨통이 트이는 광경인데!) (물론 내 탓이지만) 사람 사는 게 왜 이런가 싶다. 성공적으로 출근을 생산해냈지만 빈 사무실에 들어갈 땐 아무 것에도 실패하지 않은 채 완전히 실패해버린 기분이 들기도 한다.

결정을 해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회사에서의 일은 결정을 배제한 그 외의 모든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내가 내 나름의 기준으로 결론이나 결정을 내린 기억이 꽤나 멀리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일상적이지 않은 결정에 있어서는(오늘은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 점심은 뭘 먹지 따위가 아닌)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외면해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 아 누가 결정해줬으면 좋겠다. 근데 해 줄 사람이 없지. 그냥 미룰까. 그냥 미룰까. 그냥 미뤄졌네. 아 모르겠어. "아 모르겠어" 밖에 못할 때는 확실히 실패하면서 완전히 실패해버린 기분이 들어서 정말 별로다.

아무것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헬륨풍선처럼 두둥실 살고 싶은데 로또 외엔 답이 없다. 단순한 돈의 문제는 아니고 복잡한 돈의 문제다. 일을 하여 돈을 번다고 진짜 버는 것도 아니고,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든 되겠지'는 없다. 엄마아빠 울타리 바깥의 세상은 화폐가 다른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폰 배터리 18%쯤의 텐션으로 요즘을 살아내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이다. 맨날 맥주나 쳐먹고 그럼에도(어쩌면 그러니까)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고

병신들이 왜 저렇게까지 열심히 사는가.

따지자면 나도 싫어하는 것이 너무 많아 탈인 사람에 속하지만 딱히 열심히 싫어하지는 않는 편이다. 좋아하는 감정이 있으면, 그 반대인 싫어하는 감정이 있는 것도 너무 당연하지만 그 비호감과 혐오가 지나칠 때는 '저 새낀 뭐 저렇게 열심히 싫어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얼마 전 신촌에서 열렸던 퀴어 퍼레이드 때도 이런 생각을 했는데, 오늘 귀국한 대... »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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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 물리적으로 생존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의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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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다. 벚꽃의 꽃말이 중간고사라고.벚꽃만 피었다 하면 어김없이 중간고사도 함께 왔기에 정말 기가 막힌 표현이라고 생각했다.그와 동시에 '중간고사가 없으면 벚꽃구경도 실컷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이건 기가 막힌 착각이었다.중간고사가 없으면 벚꽃엔 다른 꽃말이 생긴다.이번 봄에 벚꽃을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도 없다.(아, 벚꽃이 올라간 빵을 먹... » 내용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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