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한 마디를 덜었을 뿐인데 거짓말을 한 것 같다.

오늘은 평소보다 한시간 반이나 일찍 출근했다.(젠장) 나는 좀처럼 아침을 거르는 법이 없는데, 그건 습관이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아침에 뭐라도 먹지 않으면 (설령 기분 탓일지라도) 서있기도 힘든 때가 종종 찾아오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아침을 챙기고 나가려면 오늘은 평소보다 한 20분은 일찍 일어났어야 했다. 하지만 어제의 나는 너무 피곤했고, 그래서 "내일 몇 시에 일어나?"라는 엄마의 질문에 "그냥 평소랑 똑같이."라고 대답했다. 지하철 앱을 켜고 도착시간을 체크해 출발시간을 역산하기엔 너무 귀찮았고(이런 앱 좀 누가 만들어라), 만약 시간이 부족하면 화장을 안 하고 가지 뭐, 하는 생각이었다.


요즘은 회사에서 돌아오면 식탁에 앉아 어른 주먹만한 대봉감을 퍼먹으며 엄마와 수다를 떤다. 이건 "2주면 이것도 끝이네."라며 딸의 독립을 자주도 상기시키는 엄마를 위한 서비스이기도 하고, 2주면 불꺼진 집에 들어가 혼자 저녁을 챙겨야 하는 나를 위한 서비스이기도 하다.


어제 저녁 서비스 타임에 엄마는 오늘 아침 메뉴를 화제로 올렸다. "지난 주말 아빠가 잡아온 우럭을 구워줄까 조려줄까, 오늘 한살림에서 어묵을 사왔는데 이거 볶아줄게, 국은 뭐가 좋을까, 오늘 앞집에서 겉절이를 나눠줬는데~" 우럭은 그냥 소금만 뿌려서 구워줘, 어묵도 바로 볶아 먹으면 맛있겠다, 국은 애호박을 넣구 안 짜게 어쩌구 저쩌구... 나는 진정 몰입해서 열심히 답변을 했다. 와 맛있겠다 내일의 아침을 먹으려면 오늘은 얼른 자야지 인생은 한 그릇의 브뤡퍼스트를 위해 돌아가는 것이니라 해가면서.


오늘 아침 엄마는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나를 깨웠고, 나는 허겁지겁 준비를 마치고 집을 튀어나갔다. 엄마는 "아침은?" 하고 물었고, 나는 "늦었어."라고 답했다. "너 평소랑 같은 시간에 일어나면 여유롭다며!" "그러게. 아니네."


올해 1월 내가 출근하기 시작하면서, 아빠가 출근한 뒤 방금 만든 잔반을 먹어치우는 것은 우리 모녀의 전통이 되었다. 시간이 허락하면 커피머신에서 커피도 좀 뽑아 마시고 말이다. 전통이란 대개 사라지기 전에 가장 애틋한 것인지라 엄마는 요즘 나와의 아침시간을 아주 귀히 여기고 있다. 늘 같이 먹었으면서, 메뉴도 같이 정했으면서 오늘은 아니라니. "그럼 조금 더 일찍 깨우라고 하지.. 잘 다녀와-"

사실 엄마한테 내일도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고 할 때부터 내일도 같은 시간에 일어나면 평소처럼 여유있게 출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는데, 빈 속의 출근길 내내 엄마를 속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한 마디를 덜었을 뿐인데 거짓말을 한 것 같다. 내가 덜지 않고 까먹어버렸다면 마음이 덜 불편했을라나.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결국 무언갈 숨기는 건가. 그렇담 하루 종일 떠들어도 하루 종일 무엇쯤은 숨기는 게 아닌가. "속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난 그냥 말을 안 했을 뿐인데 결국 속이고 말아야만 하는 건가. 속이려던 게 아니라면 길 가던 사람의 관심이라도 붙잡고 속내를 다 부어내야만 하는건가. 속이기도 싫고 말할 이유도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모르겠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것 만큼이나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관심은 없겠지만, 남이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에 나는 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저런 이유론 멈춰지지도 않는다.


생각하면 심란한 일을 회피하는 데에 점점 습관이 들어간다. 이런 일을 들쑤시는 사람이나 사건도 너무도 달갑잖다. '아 까먹고 싶다. 제발 까먹었음 좋겠다.' 하면서 많은 부분이 되려 선명해지기만 하지만 저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나는 대학교 때 학점포기제가 없는 게 참 한스러웠는데 인생에서 세 개 쯤의 기억은 좀 포기해도 좋겠다. 적절한 망각만한 마약도 없지 않나.

죽은듯이 살아야겠단 생각

어떤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그건 내 입장일 때의 이야기고, 그 나이와 그 상황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이해가 안가는 만큼 안타까웠고(그건 불쌍함이었지만 차마 불쌍하단 단어를 쓰기는 너무나 죄송하다) 그러고 나니 아주 서러워졌다.행복해지기 위해 드는 품이 너무나 크다. 물가는 ... » 내용보기

아무 것에도 실패하지 않은 채 완전히 실패해버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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